2개월만의 이직과 퇴사 — 내가 배운 것들

오늘의 에세이
교육이 중요하다고 느꼈고, 부모님 곁에 있고 싶었다. 그렇게 탄 기차가 잘못된 방향이라는 걸 안 건, 내린 다음이었다.
Published

2026.03.30

“교육이 중요하다고 느꼈고, 부모님 곁에 있고 싶었다”

나는 왜 안정적인 외국계 보험사를 떠나 대구의 사립대학을 선택했는가.

보험사 PMO로 일하던 시절, 나는 나름대로 잘 지내고 있었다. 큰 어려움도 없었고, 조직 안에서의 포지션도 안정적이었다. 그럼에도 뭔가 계속 걸렸다. 앞으로 30년을 일한다면, 나는 어떤 산업에서 의미를 찾을 수 있을까.

그때 내가 내린 답은 ’교육’이었다. 사람이 태어나서 늙을 때까지 평생을 가르치고 배우는 일 — 그 장(場)으로 가고 싶었다. 대학이라는 곳이 바로 그 공간이라고 생각했다.

이유는 하나 더 있었다. 본가가 대구였다. ’내가 아니면 할 수 없는 일이 무엇인가’를 고민했을 때, 부모님 곁에 있는 것은 정말로 나만이 할 수 있는 일이었다. 결혼을 생각하던 여자친구도 지방 이주에 크게 거부감이 없었다. 조건은 충분해 보였다.

대구의 한 사립대학교에 행정직으로 합격했다. 감사하게도 학교 측에서 나를 좋게 봐주셨다. 연봉이 기존보다 낮을 거라는 걸 알면서도, 두 가지가 그 차이를 상쇄하고도 남는다고 생각했다. 교육 도메인에서의 경험, 그리고 부모님 곁이라는 것. 가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그렇게 나는 대구행 기차를 탔다. 내가 그 기차가 잘못된 방향으로 가고 있다는 걸 안 건, 내린 다음이었다.

넥타이, 다나까, 그리고 300페이지짜리 PPT

예상했던 것과 다른 건 연봉만이 아니었다.

외국계 보험사에서 자유롭게 일하다 왔으니, 사립대학의 분위기가 다를 거라는 건 알고 있었다. 그런데 ’다르다’의 스케일이 달랐다. 와이셔츠에 넥타이. 선배가 들어오면 의자에서 일어나 공손히 인사하고 다시 앉는 문화. 공식적으로 명시된 건 아니지만, 조직 안에 깊이 배어 있는 다나까 문화가 있었다.

적응하고 싶지 않았다. 아니, 더 정확히는 — 적응해야 한다는 생각 자체가 들지 않았다.

업무도 마찬가지였다. 첫 달, 내게 주어진 일은 중장기 발전계획 PPT 편집이었다. 300페이지 분량의 문서 안에서 헤더, 표, 텍스트 스타일을 통일시키는 것. Gemini를 활용한 python-pptx 코드로 어떻게든 처리했지만, 이건 인간이 잘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기계를 위한 일이었다.

퇴근 후에도 쉴 수 없었다. 포괄임금제라 야근 수당은 없었다.

회사 밖의 삶도 예상과 달랐다. 부모님은 나를 극진히 대해 주셨다. 그러나 나는 통제받는 것을 싫어한다는 걸 그제야 알게 됐다. 서울 자취방에서 자연스럽게 해오던 것들이 이제는 허락을 받거나 눈치를 봐야 하는 일이 됐다. 효도하러 간 곳에서 내가 먼저 불편해지고 있었다. 그 기운이 여자친구에게도 전해졌다.

대학 교직원은 정년을 보고 오는 곳이라는데

이곳에서의 커리어가 길어질수록, 다른 곳으로의 문은 좁아진다.

버텨보려 했다. 그런데 어느 순간 다른 계산이 들어왔다. 대학 교직원이라는 포지션은 정년을 바라보고 오는 곳이다. 여기서 시간이 쌓일수록, 다른 회사로 가기는 점점 더 어려워질 것이라는 판단이 섰다.

출구전략을 세웠다. 다니면서 서울로 복귀하기 위한 준비를 병행했다. 퇴근 이후 쏟아지는 채용공고들을 쳐내려 했지만, 그 여력이 남아 있지 않았다.

결국 두 달 만에 퇴사했다.

짧은 재직 기간이 이력서에 남는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더 있는 것보다 나온 게 낫다고 판단했다. 이미 맞지 않는다는 걸 알면서 버티는 시간이 낭비라고 느껴졌고, 커리어 관점에서도 이 경험이 길어지는 게 유리하지 않다는 판단이었다.

서울로 돌아오는 기차 안에서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나는 잘못 탄 게 아니었을까? 아니면, 탄 건 맞는데 내릴 역을 착각한 건 아니었을까? 둘 중 뭐가 더 맞는 말인지는 지금도 잘 모르겠다. 다만 이 경험에서 배운 것들을 정리해두지 않으면, 같은 실수를 다시 할 거라는 건 안다.

내가 나에게 쓰는 편지 — 대구 이직 2개월의 Lessons Learned

다음번에 같은 후회를 하지 않기 위해 기록을 남긴다.

[의사결정에 대해]
• JD가 없는 공고는 도박이다. 내가 무슨 일을 하게 될지도 모르고 간다는 뜻이다. 정보를 요청해라. 그래도 주지 않으면, 가지 마라.
• 오퍼레터를 받고 움직여라. 그 전까지는 현재 포지션을 유지하라. 합격이 항상 좋은 신호는 아니다.
• 대중이 같은 선택을 하는 데에는 이유가 있다. 그것을 뒤집을 만큼 강력한 근거가 있는가?

[관계와 자립에 대해]
• 네가 먼저 잘되어야 한다. 네가 바로 서야 효도도 하고, 사랑도 한다.
• 30이 넘으면 부모님과 따로 살아라. 태양이 너무 가까우면 살이 탄다.
• 다른 사람의 생로병사를 대신 질 수 없다. 내가 부지런히 움직이는 게 답이다.

[커리어와 삶에 대해]
• 안정적이고자 할수록 불안정하다. 연봉은 시장에서의 나의 가치다.
• 경력기술서를 생각하면서 일하라. 기록하지 않으면 없는 것이다.
• 인생을 이루는 것들은 단단하지 않다. 건강, 관계, 돈 — 모두 사라지기 쉬운 것들이다.
• 사건 후에는 Lessons Learned를 적어라. 이 글이 그 시작이다.